컴퓨터와 수학을 공부해야 할까? 1편

컴퓨터와 수학을 공부해야 할까? 1편

2019, Aug 12    

컴퓨터와 수학을 공부해야 할까? 라니. 매번 생각하지만 나는 제목 짓는 센스가 영 꽝인 것 같다.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단순한다- 첫째로 텅텅 비어있는 블로그에 뭔가 의미있는 글을 쓰고 싶고, 둘째로 그냥 심심해서다. 마지막 이유는,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좋은 글이 국내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엄청 근사해 보이는 단어 때문인지 정부의 코딩 교육 때문인지 “왜 코딩을 배워야 하는지” “왜 SW를 배워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훌륭한 글은 많다. 그러나 “컴퓨터”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해봤자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요즘 대세고, 모든 것이 컴퓨터로 이루어지고…하는 식의 글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채우는 뭔가 괜찮은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래, 컴퓨터는 그렇다 치자. 그러면 갑자기 “수학”이 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다. 간단하게 답변하자면, 컴퓨터에 대한 학문- 컴퓨터공학과 컴퓨터과학은, 결국 수학의 한 부류이기 때문이고, 수학에 대한 이해 없이 컴퓨터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이후 포스팅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왜 우리는 컴퓨터와 수학을 공부해야 하나요?” 라는 다소 뻔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앞으로 이 질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블로그에 담을 계획이다. 사실 굉장히 고민했다. 뭔가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넣으려고 제목에 무서운 단어를 하나 포함시킨 건 아닌지, 글의 수준은 어느 정도로 해야 적당할지 이것저것 생각을 늘어놓고만 있었다. 그런데,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중,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고, 이 의문에서부터 글을 시작하면 굉장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컴퓨터공학, 아니 컴퓨터과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짧은 이야기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난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고 살았다. 물론 원시인이 아니기에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워드랑 파워포인트 좀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유튜브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자주 접속했고, 스팀에서 게임을 구매해 플레이하기도 했다.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 내 또래, 20대 초중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컴퓨터를 이 정도 수준으로 다룰 수 없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일단 모두가 스마트폰이라는 고성능 컴퓨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좀 다루고 어쌔신크리드 몇편 클리어한 경력을 가지고 “컴퓨터를 안다”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컴퓨터를 해봤다” 라는 말은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컴퓨터를 해본” 내가 현재 컴퓨터공학과 학사 학위를 따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는다. 1학년 때 듣기 싫어서 치워둔 필수교양이 발목을 잡지만 않는다면 뭐 이런 얘기를 한다면 다들 점수 맞춰 컴공 갔다가 우연히 적성을 발견했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뭐 그런것도 아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노벨상을 받는 화학자를 꿈꾸었다. 그 꿈을 이루고자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수준의 화학 강의를 신청해 수강했고 (요즘 교육계 적폐 1순위로 꼽히는 자율형사립고를 졸업한 덕분이다), 대학 원서도 전부 화학과로 넣었다. 물론 화학도의 꿈은 단 한 과목에 의해 와장창 깨졌다.

정말 이 수준으로 깨졌다...

1학년 1학기,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학에 입학한 나의 꿈을 와장창 박살낸 <일반화학실험> 과목은 내 모교인 포항공대 1학년 학생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었다. 사실 커리큘럼은 나쁘지 않았다. 책에서만 보던 실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일반화학 과목에서 배운 이론들을 실제 실험을 통해 체화할 수 있었다. 문제는, 포항공대 화학과에는 보고서를 모두 손으로 써야 한다는 그야말로 적폐 그 자체인 제도가 있다는 점이다. 주머니에 초고화질 영화를 몇십 편씩 저장할 수 있는 핸드폰을 모두가 들고 다니는 2010년대에, 데이터베이스화하기도 어렵고 유실될 위험도 높은 수기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학생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 방침은 <일반화학실험>을 포함해 모든 전공 과목에 적용된다. 이 대단한 학과 방침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을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손으로 실험 기록을 그때그때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면 남의 보고서를 쉽게 베낄 수 있다. 그때그때 사용 가능한 메모장이 있는 스마트폰과, AI 표절 검사 시스템은 아마 22세기나 되어야 나오지 않을까?

하여튼, 손으로 10장이 넘는 보고서를 매주 쓰는 행위는 강한 회의감을 안겨주었다. 안 그래도 지루하게 느껴졌던 실험을 다섯 배는 더 지리멸렬하게 만든 것 같다. 그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이공계 종사자라면 알겠지만, 화학과 / 생명과에서는 실험하며 밤을 새는 것이 거의 뭐 일상이다. 그렇기에 1학년 실험 과목의 지루함과 피로감도 견디지 못하던 나에게 고학년 실험 과목들을 들으며 계속 손으로 보고서를 쓰고, 대학원에서 실험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생각을 아마 2학년이 된 2017년 초까지 했던 것 같다.

그러다 학기 중 휴학을 선택했다. 물론 이 이유만으로 휴학한 건 아니다. 몇 가지 일이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았고, 생각과는 달랐던 학교 생활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물론 진로에 대한 근심이 압도적인 원인이었다. 다행히, 이 떄 선택한 휴학은 내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휴학?

사람에게 갑자기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휴학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급작스러운 자유시간에 대한 나의 태도 변화를 DABDA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 모델) 에 억지로 끼워맞춰 설명해 보겠다.

  1. 부정
    일단 갑자기 변한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래 하던 바쁜 생활을 반복하려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다던지, 뭔가 시간을 계속해서 의미있게 쓰려 한다. 물론 사람은 쉽게 나태해지는 존재이기에, 이 단계는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2. 분노
    1단계가 빠르게 지나가고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스스로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한다. 기껏 시간이 많아졌는데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열심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나태지옥에 빠져버린 몸은 절대 뇌가 원하는 것처럼 부지런한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계속 화가 나지만 해결하지는 못하는 고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3. 협상
    이 시점에 돌입했다는 것은 몸에 이어 뇌가 나태지옥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함으로써 시간을 갖다 버려도 별 죄책감이 들지 않게 된다. 이에 따라 킬링타임을 위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나는… 호드의 일원으로서 불타는 군단으로부터 아제로스를 구했으며, 암살단원이 되어 악독한 템플러들이 파괴한 북미 암살단 지부를 재건하는 업적을 남겼다.

    일리계신 살아단님과 함께 싸웠던 시절을 잊지 못할 겁니다.

  4. 우울
    4단계에서는 3단계에서 즐기던 여러 가지 유희들도 질려서 재미없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2주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적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영화를 봐도 재미없었고, 책을 읽어도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5. 수용
    이 단계에 들어서기까지 1달 반 정도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고, 맨날 놀고 먹기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뭔가 활동하기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음” 이라는 상황 자체가 귀찮고 지겨워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찔러보기 시작했다.

5단계에 들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돈이 필요해 과외를 몇 개 잡았다. 시간은 차고 넘치니 서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과외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쓰는 돈에 비해 버는 돈이 많아졌다. 100평이 넘는 강남 최고급 빌라에서 과외한 적이 있었는데, 과외비로 100만원짜리 수표를 몇 장씩 받고 그랬었다. 뭐 직장인에 비하면 적은 돈이겠지만, 그 당시 내가 부린 사치라고는 친구들이랑 술집 가서 소주 몇 병 까놓고는 “내가 쏜다!!” 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그렇던 나에게 과외를 통해 번 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액수였다. 2년여가 지난 현재, 나는 다시 무일푼이다

시간과 돈이 넘쳐흐르는 상황에서, 여행은 두 가지를 모두 의미있게 소비할 수 있는 좋은 활동이다. 서울 방방곡곡,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타국에 나가 재밌고 새로운 경험을 즐겼다. 인도에서 전통 악기를 배웠고, 충남 서산에서는 그놈의 서산마애삼존불상 보겠다고 몇 시간 동안 산길을 헤메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때 국내 관광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가용 없이 주요 관광지에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지자체 관계자 분이 계신다면 제발 대중교통 확충좀…ㅜㅜㅜ) .
또 최근 TV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으로 유명해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중 우연히 현지 신문에 의해 취재당하는(?) 진기한 경험도 했다.

아래쪽 조그만 사진 오른쪽 밀짚모자가 나다...
한국에서는 언제쯤 신문에 실릴 수 있는 사람이 될려나

하여튼, 여행을 다니던 중 작은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인도 바라나시를 방문했을 때 시작된 이 생각은 거의 4~5개월간 나를 지배했다. 갠지스 강을 끼고 발달된 이 도시는 힌두교의 성지로, 상당수 인도인들이 이곳에서 화장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지기 위해 죽기 직전 이곳을 찾는다 한다. 비단 인도인뿐만이 아니다. 인도 문화에 감화되어 힌두교로 개종까지 했던 유명 로큰롤 그룹 Beatles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의 유골도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큰 울림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사실 가기 전에는 그냥 별 생각 없었다. 그냥 같이 갔던 친구가 짜놓은 일정이 이 도시가 포함되었기에 방문했던 것 뿐이다.

그런데 이 도시는 내게 지금껏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강물에 떠내려가거나, 화장터에서 타고 있는 시체들을 보며 죽음이 절대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내 몸도 저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삶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짧은 삶을 의미있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론은 단순했다.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나는 인간이라는 종족으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시키는 것이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간단한 결론은, 이 글의 첫머리에서 제시한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나”는 왜 컴퓨터공학, 아니 컴퓨터과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2편에서 계속…